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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산(蘇萊山)

산행·트레킹

by 바 람 2023. 2. 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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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어머니에게 아침 저녁 손수 조리한 찬으로 상을 올렸다는 하연(河演)의 세째 아들인

하우명(河友明)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효자정각

 

 

 

 

 

 

 

소산서원의 외삼문에 "마음을 정돈하여 바른 마음가짐으로 들어서다'라는 의미"의

입정문(入正門)이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있다

하연 사후 1455년(세조1년) 이곳에 소산재(蘇山齋)라는 하연의 재실(齋室)을  지었으나

소실이 되어 세조12년에 하연의 세째아들 우명(友明)이 다시 영당을 재건하고 봄 가을로

향사를 지내 오다가  1963년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쇄락한 소산재를 중건 하였으며

1995년에 이름을  소산서원(蘇山書院)이라 고쳤다

 

하연(河演)은 고려말 우왕2년(1376년)에 경상도 진양(진주)에서 태어났다

하연은 8세 때부터 부친 하자종으로 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4세 때인 1389년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공부했다

하자종은 이색,정몽주,길재등과 두루 교류를 했던 학자 문신이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하연의 조부 하윤원과 부친 하자종은 정선땅 두문동으로 들어가 세상과 절연하고

은거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하연(河演)은 부친 하자종의 고종사촌인 강회백의 권유로

1407년(태종7년)에 공조참의로 조정에 출사한 후 승승장구하여 이조참판,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황희, 허조와 함께 세종조의 명재상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말년에 하연은 문종의 세자시절의 스승이였으며   금성대군, 안평대군및  젊은 집현전 학사들과도

폭넓게 교류를 하였다

 

 

 

 

계란마을은 신천동 고가도로 근처에 위치한 마을로 문정공 하연(河演)의 묘가 있는 아래쪽 마을로

진양(진주) 하씨들이 모여 살면서 조성된 마을이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1453년(단종1년) 하연이 세상을 떠나자 단종은 부왕 문종의

세자시절 스승이였던 하연을 위해 친히 지관을 보내 길지를  찾아보게 하였다

지관이 소래산 아래 지금의 묘터에 계란을 놓았는데  다음날 새벽이 되자  병아리 울음소리가

들려  그곳이 명당임을 깨닫고 그자리에 하연의 묘를 썼다고 한다

 

그후 후손인 진양(진주)하씨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 되면서

사람들이 계란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원 뒷편 하연(河演)의 위패를 모신  문효사(文孝詞) 

 

 

 

 

 

소산서원 오른쪽 담장 옆으로  네모난 불록이 깔린 길을 따라가면  볕이 잘드는 작은 언덕에

소박하지만  아담하게 꾸며진 하연(河演)과 부인의 합장묘가 있다 

1451년 영의정에서 물러난 하연(河演)은 2년 뒤인 1453년(문종3년) 78세로 세상을 버리고

이곳 소래산 자락에서 영면에 들었다

 

 

 

 

 

 

 

하연의 아들과 존자인  하제명과 하중호의

 

 

 

 

 

 

 

 

 

 

 

 

 

 

 

 

 

 

 

 

 

 

 

 

 

 

 

 

 

 

 

 

 

 

 

 

 

 

 

 

 

 

 

성주산 너머로 

삐죽이 큰 키를 드러낸  쌍둥이 리첸시아아파트와  부천시 일원

오른쪽 끝이 성모병원 뒤 원미산 같고 그 뒤가   우리동네와  춘의산 쯤인  듯하다

 

 

 

 

 

 

 

 

 

 

 

 

 

 

 

왼쪽이 장수동 은행나무촌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정면에 나있는 길이 송내동에서 시작하여  성주산을 거쳐 소래산으로 올라오는 길이다

 

 

 

 성주산 갈림길에서  장수동묵밥집 방향으로 내려 오면서 바라보는

상아산(왼쪽)과 관모산

 

 

 

 

 

대공원 동문주차장에서 상아산으로 오르는 등로가

고속도로처럼 넓직하다

 

 

 

 

상아산(151m)

 

 

 

 

 

관모산(冠帽山 162m)

관모산은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비가올 때 비를 피하기 위하여 썼던 갈대로 갓처럼 엮어 만들어

머리에 썼던 "갈모"를 닮았다하여 갈모산이라 불리었던 것이

음(音)이 변하여 관모산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 때에 우리국토의 지명을 정리할 때  이름이 바뀐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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