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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逍遙山 경기동두천 587m)

산행·트레킹

by 바 람 2009. 10. 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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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일 : 2009년10월20일

 산행코스 :  매표소 - 일주문 - 원효폭포 - 속리교 -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칼바위 - 나한대

                    -의상대 - 공주봉 - 구절터 - 속리교 - 일주문

 

 

 

 

 

 

 

 

 

 

 

 

▲  원효폭포                                                                                                                                                                                                                                                 

 

 

 

 

 

 

 

 

 

 

 

 

 

 원효는 신라 진평왕 때인 서기 617년에 경상도 압량군 불지촌(지금의 경산군 자인면)에서  태어나 서기686년

 말년에 기거한며 수도하던 혈사(穴寺)에서 75세로 입적했다고 한다.

 원효는 출가하여 자신이 살던집을 초개사라는 절을 만들었으며 서기650년(진덕여왕2년)에 황룡사의

 승려가 되었는데 아마 이때에 불심이 깊었던 요석공주와 알게된것이 아닐까?..... 원효는 화랑이였던  남편을

 잃고 청상이 된 요석공주와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파계(破戒)되었다는 자괴감에 가사장삼을 벗고 자신을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고 떠돌아 다니며 민중속으로 파고 들어가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다.   

 

 

 

 

 

 자재암(自在庵)은  조계종 봉선사의 말사(末寺)로서 서기 654년인  신라 태종무열왕1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꿈에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자재무애(自在無碍)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자재암이라 했다고 한다.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길에 날이 저물어 어느 묘혈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잠결에 심한 갈증을 느껴 발치에 놓여있던 바가지의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깨어 보니

 어제밤에 달게 마신물이 무덤속의 해골에 고인 물이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원효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정하고 부정한것, 아름답고 추한것 ,부하고 빈한것 등 모든 상반되는 모든 관념들은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청량폭포(淸凉瀑暴)

 

 

 

 

 

 

 

 

     ▲중백운대(中白雲臺)

 

 

 

 

 

 

 

 

 

 

 

 

    ▲칼바위능선 구간

 

 

 

 

 

 

 

 

 

 

 

 

 

 

 

 

 

 

 

 

  의상대를 향하여 나한대(羅漢臺)를 내려서니 꼬불꼬불한 철계단이 나타난다. 거대한 기암과 울긋불긋한 단풍과

  인공 철구조물이 어울어져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아름다운 세상(世上)에 존재하고 있다는 그자체만으로도 무한히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상대(義湘臺)

 원효가  의상보다 8살 위였지만 서로 배척하지 않고  불교중흥을 위해서 뜻을 함께 하였다고 한다. 의상은

 신라 귀족인 진골 출신이였지만 원효는 귀족출신이 아닌 6두품출신이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원효가 남루한 차림의 거사(居士)행색으로 민중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포교한것과는 달리 의상은 고결하고 단아한 스타일로 불법을 설파하였다.

 아마 의상대라는 이름도 의상대사(義湘大師)에 대한 존경과 친근함에서 원효가  붙힌것이 아닌지........... 

 

 

 

 

 

   ▲나한대에서 본 소요산 정상인 의상대

 

       

 

 

 ▲공주봉의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가  

     잠시 숨을 돌리며 바라보니 지나온 의상대가 코앞에 있다.

 

 

 

 

 

 

 

 

 

 

 

 

 공주봉에 다다르니 키작은 싸리나무들이 누렇게 빛바랜 잎을 흔들며 반긴다.

 운치있게 처져있는 목책(木柵) 밑으로 동두천 시가지가 내려다 보인다.

 공주봉(公主峰) 정상의 돌탑.  이 공주봉이라는 이름도 원효가 세속의 애틋한(?) 정인(情人)을 위해서  붙힌

 이름은 아닐까......

 어쩌면 "요석공주"는  외롭고 답답할 때마다  이봉(峰)을 숱하게 올랐을지도 모른다."이번에는 얼마나

 있다가  돌아 올런지..." 기약없이 떠돌아 다니는 원효를 기다리며 ...

 또 때로는 고향의 동기들을 그리며 천리밖 서라벌쪽 하늘을 바라보곤 했으리라....

 

 

 

 

 

 

 

 

 

 

 

 

 

 

 

 

 

 

 

 

 

 

 

 

 

 

 

 

 

 

 

 

 

 

 

 

 

 

 

 

 

 

 

 

 

 

 

 

 

 

 

 

 

 

 

 

 

 

 

 

 

 

 

 

 

 

 

 

 

 

 

 

 

 

 

 

 

 

 

 

 

 

 

 

 

 

 

 

 

 

 

 

 

 

 

 

 

 

 

 

 

 

 

 

 

 

 

 

 

 

 

 

 

 

 

 

 

 

 

 

 

 

 

 

 

 

 

 

 

 

 

 

 

 

 

 

 

 

 

 

 

   화사한 아침햇살이 내리는 소요산의 가을정취를  

   화폭(畵幅)에 담고있는 노화백의 삼매경

 

 

 

 

 

 

요석공주 별궁지(別宮址)                                                                                                                      

요석공주가 원효와의 사이에서 낳은 설총(薛聰)을 데리고  멀리 서라벌에서 원효가 있는 이곳으로 와서 별궁을

짓고 아들 설총(薛聰)을 키우면서 살았다고 한다. 

요석공주(瑤石公主)는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딸이라고만 알려져 있을뿐 자세한 것은 기록이 없다.

요석공주가 김춘추의 둘째누이라는 설도 있으나 춘추의 부(父)인 용춘에게  딸이 있었다는 기록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있다해도 부(父)의 신분으로 볼때 공주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무열왕의 딸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무열왕(김춘추)에게는 보량(미실의 아들인 보종의딸),문희(김유신의동생),보희(문희의언니)3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9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이 있었는데 보량과 문희의 딸들의 이름은 기록이 있으나 세째부인 보희가

낳은 딸들의 이름은 역사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공주라고 불린점으로 봐서 요석공주는 김춘추가 사통(私通)관계로 얻은 딸이 아니고 보희가 낳은 두

딸중의 한명이 아닐까 하는 설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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