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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산(蘇萊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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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 람 2023. 8. 1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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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고개 와 수려사 이정표가 있는 들머리에 계단 옆에 세워져 있는 하우고개 안내판이 제멋대로 길게 자란 수풀에

가려져 반 쯤밖에 보이질 않는다 

 

"옛날 이 고갯길은 뱀내장터(시흥 신천동)에서 황허장터(黃魚場攄 지금의 계양구 장기동)를 오가는 장사꾼들이

 주로 이용했던 길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개 주위에는 도둑들이 많아서  장사꾼들이 고개를 넘으려면 산 밑 주막에 기다렸다가 사람들이 모이면

무리를 지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장사꾼들이 이 가파른 산길을 서둘러 오르다가 고갯마루에 쉬면서 안도와 함께  '하우 하우'하고 거친 숨을

내 쉰데서   하우고개라고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약수터 고개마루에서  30여분쯤 오르자 만나는 성주정이다

김포 문수산에서 이곳 성주산을 거쳐 광교산 을 지나 뻗어 나가는 한남정맥 성주산이다 

군부대 때문에  정상을 빼앗기고 철조망 아래로 밀려나 좁은 비탈길에  볼품없이  서있는 정자 기둥이 성주산(216.5m)

정상이라는 파란색 명찰을  달고있다

원래는 산이  소가 엎드려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우산(臥牛山)이라고 불렀었는데 일제 때에 지명정리를 하면서 

성주산이라고 바뀌었다고 한다

언제 일제 때 잃어버린  내(川), 산, 마을들의 아름다운 옛 이름을 되찾을 수 있을런지................

 

 

 

 

 

 

 

성주산을 내려와서 가파른 화강암 돌 층계를 내려서서  안의골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지나면 정상 바로 아래

몇십명이라도  거뜬히 쉴 수 있는  넓직한 쉼터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면  소래산으로 직행이다

왼쪽 완만한 길을 버리고 일부러 오른쪽 가파른  바위로 오르는 것은 이곳을 오르면서 바라보는 조망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계란마을은 신천동 고가도로 근처에 위치한 마을로 문정공 하연(河演)의 묘가 있는 아래쪽 마을로

진양(진주) 하(河)씨들이 모여 살면서 조성된 마을이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1453년(단종1년) 하연이 세상을 떠나자 단종은 부왕 문종의

세자시절 스승이였던 하연(河演)을 위해 친히 지관을 보내 길지를  찾아보게 하였다

지관이 소래산 아래 지금의 묘터에 계란을 놓았는데  다음날 새벽이 되자  병아리 울음소리가

들려  그곳이 명당임을 깨닫고 그자리에 하연의 묘를 썼다고 한다

 

그후 후손인 진양(진주) 하(河)씨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 되면서  사람들이

 이마을을 계란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병든 어머니에게 아침 저녁 손수 조리한 찬으로 상을 올렸다는 하연(河演)의 세째 아들인

하우명(河友明)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는 효자정각이 소산서원으로 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다

 

 

소산서원으로 가는 길

 

 

 

소산서원의 외삼문에 "마음을 정돈하여 바른 마음가짐으로 들어서다'라는 의미"의

입정문(入正門)이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있다

하연 사후 1455년(세조1년) 이곳에 소산재(蘇山齋)라는 하연의 재실(齋室)을  지었으나

소실이 되어 세조12년에 하연의 세째아들 우명(友明)이 다시 영당을 재건하고 봄 가을로

향사를 지내 오다가  1963년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쇄락한 소산재를 중건 하였으며

1995년에 이름을  소산서원(蘇山書院)이라 고쳤다

 

하연(河演)은 고려말 우왕2년(1376년)에 경상도 진양(진주)에서 태어났다

하연은 8세 때부터 부친 하자종으로 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4세 때인 1389년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공부했다

하자종은 이색,정몽주,길재등과 두루 교류를 했던 학자 문신이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하연의 조부 하윤원과 부친 하자종은 정선땅 두문동으로 들어가 세상과 절연하고

은거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하연(河演)은 부친 하자종의 고종사촌인 강회백의 권유로

1407년(태종7년)에 공조참의로 조정에 출사한 후 승승장구하여 이조참판,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황희, 허조와 함께 세종조의 명재상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말년에 하연은 문종의 세자시절의 스승이였으며   금성대군, 안평대군및  젊은 집현전 학사들과도

폭넓게 교류를 하였다

 

 

 

붉게 꽃을 피운 배롱나무가 있는 소산서원 오른쪽 담장 옆으로  네모난 불록이 깔린 길을 따라가면  볕이 잘드는

작은 언덕에 소박하지만  아담하게 꾸며진 하연(河演)과 부인의 합장묘가 있다 

1451년 영의정에서 물러난 하연(河演)은 2년 뒤인 1453년(문종3년) 78세로 세상을 버리고

이곳 소래산 자락에서 영면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