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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성답사

산행·트레킹

by 바 람 2009. 1. 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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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 2009년1월1일

 종주코스 : 서대문(돈의문터) ㅡ 인왕산새해일출 - 창의문 - 북악산 - 숙정문 - 성북동 - 낙산 - 동대문 - 광희문 - 장충동

                 - 남산 - 남대문 - 서대문

 소요시간 : 10시간30분(07:00~17:30)

 

 

 

 

 

 

   인왕산 일출

 

 

 

 

인왕산 기차바위

 

 

 

 

 

 

 

 

                  북한산

 

 성벽의 왼쪽부분 다듬어지지않은 돌로 쌓은 것은 세종4년(서기1422년)무렵의 것들이며 오른쪽 부분 반듯하게

 다듬어진 돌로 쌓은 성벽은 숙종30년(서기1704년)경에 보수하거나 쌓은 것이다

 

 

 

 

 

 

 

 창의문(북소문)

 창의문은 도성 4소문중 하나로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태종13년 최양선의 지리도참설에 의해 숙정문과함께 폐문 되었다. 궁장축조와같은 대역사가 있을시에 역력(役力)의

 효율을 위해 창의문을 열어 일시 통행을 허락하는 외에는 창의문은 영조17년에 문루를 개축하면서 인조반정시

 공을 세운 김류,이괄,원두표등 공신들의 공신명이 기록된 현판을 걸었는데 이현판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다.

 창의문은 4소문 중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문이다. 창의문 보다는 자하문으로 백성들 사이에선 더 많이 불리어졌다.

 

 

 

 

 

 

 

 

 

 

 

 

 

 

 

 

1.21사태 소나무

1968년 북한 124군 공비들의 청와대 습격당시 우리 군경들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던 흔적이다

200여년 된 이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서울성곽(사적10호)은 서울 중심의 주위를 둘러싸고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후 일차적으로

종묘와 궁궐을 지은다음 태조 4년(1395년)에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백악(白岳) 인왕(仁王),목멱(木覓),낙산(駱山)을

연결하는 5만9500척의 성터를 계획하고이듬해 정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태조 6년에 흥인지문의 옹성을 끝으로

완성을 보게되었다. 

그후 세종4년과 숙종때에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다.

 

 

 

 

 

 

 성벽이 작은 돌로 쌓은 것과 커다란 돌로 쌓은 것으로 구분 되는데

 왼쪽의 작은 돌로 쌓은 성벽은 태조 5년(1396년) 축조 당시의 성벽이고 오른쪽은 나중에 보수하며 다시 쌓은 .

 성벽이라고 한다

 

 

 

 

 촛대바위를 뒤쪽에서 본 모양이다

 앞쪽에서 보아야 제대로 된 촛대모양이나 앞쪽은 청와대 경호상 출입금지 구역이으로 되어 있다.

 

 

 

 

 

숙정문(북대문)

숙정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백악산)의 동쪽마루에 위치하고있으며 태조5년(서기1396년)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태종13년(서기1413년)최양선이 북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동령과 서령에 있는

숙정문과 창의문을 폐쇄해야 한다고 상언하였다.

이에따라 숙정문은 항상 닫아놓고 통행을 금지 시켰다.

다만 태종16년(1416년) 예조에서 마련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의하여 한해가 심할때는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으며 인정과 파루를 알리는 종루의 종을 치지 않고 쟁(錚)을 치고 비가오면 원래대로 환원하였으며

장마가 심하면 이문을닫고 숭례문을 여는 풍습이 전하여졌다.

이것은 북쪽방향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한해가 심할때는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해야 한다는

음양오행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저 아레 그 유명한 삼청각이 왼쪽에 보인다.

 1972년 건립되어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등의 막후협상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금은 복합전통문화 공간으로 탈바꿈 하여 운영되고있다.

 

 

 

 

 

 

 

 

 

 혜화문(동소문)은 도성의 4소문중 하나로서 태조5년 건립당시에는 홍화문(弘化門) 이라 불리었으나

 성종14년 창경궁을 건립하면서 창경궁 동문을 홍화문이라 명명하므로서 중종16년에 같은이름을 피하기  위해서

 혜화문이라 개칭하게 되었고 한다.

 도성의 소문이었지만 북문인 숙정문이 거의 닫혀있기 때문에 이 문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실질적인

  대문의 역활을 한 셈이였다.

 

 

 

 

 

 무허가 불량건축물과 시설물들을 철거하고 성벽주변을 소공원이나 주민들의 쉼터를 조성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주민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것도 좋은일이지만 훼손된 성곽을 복원하는 일이 반갑다.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제대로된 복원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낙산공원

 

 

  동대문에서 만난 일본인 여행객들

 

 

 

 홍인지문

 서울도성의 동쪽에 나있는 문으로 태조7년(1398년)에 창건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문루는 고종6(1869년)에

 중건된것이다.  적의 공격에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서 문밖으로 옹성을 두른것이 특징이다.

 석축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5칸 측면2칸의 중층 문루를 세우고 기둥 위의 공포는 다포식이며 지붕은

 우진각으로 되어있다

 

 

 

 

 

 

 왼쪽으로 보이는 다섯개의 구멍이 청계천공사 하면서 만든 청계천으로 흘러 들던 오간수 문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철거중인 동대문운동장(축구장) 공사현장이다

  땅을 파내다가 조선시대 대형 건축물의 기단이 발견되어(성벽의 기단부만이 있을 것으로 예상 했으나  뜻밖에..)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광희문(수구문)

 광희문은 동남쪽에 위치하는 4소문 중의 하나로서 남소문 수구문이라고도 불렸다.

 수구문은 남산 동북골짜기의 물이 이문 부근을 통과하여 흐르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료되며 이 문으로 시체가

 많이 나간다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이남소문(광희문)외에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한강나루와 연결되는 별도의 남소문이 세조3년에 설치되었으나

 12년후인 예종1년 임원준등의 건의에 의해 폐문되었다.

 

 

 

 

 

 

 

 

 

 

  남산공원의 성곽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반갑고 다행스러웠다.

  기단 위부분의 돌에 축성당시에 편수등의 이름등이 새겨진 글자들을 여러곳에서 볼수 있었다.

 

 

 

 

 

 

 

 

 

  멀리 보이는 것이 북한산이다

  타워호텔쪽에서 자유총연맹 마당을 가로질러 국립극장 옆으로 남산으로 코스를 잡았으나 타워호텔이 보수공사 관계로

  휀스가 처져있어 우회해서 타워호텔 옆에 새로 조성중인 소공원을 거쳐 남산으로 진행하였다.

 

 

 

 

 

 

 

 

 

 

 

 일제시대 일본의 신사를 남산에 세우면서 종로구 무학동으로 옮긴 국사당이

 원래에 위치하던 곳이다.

 

 

 

 

 

 

 

 

 

 

 

 

 

 

  도심의 성곽들은 집을 짓거나 도로를 만들면서 대부분 헐리어 없어지고 군데군데 조금씩 남아있다.

  남대문 부근의 성곽부분이다.

 

 

 

 

 

 

 

 

 

 숭례문(남대문)

 국보1호로서 서울도성의 정문인셈이다. 태조4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3여년만에 완공하였으며 세종29년 (1447년)에

 고쳐짓고 성종10년에도 큰공사가 있었다.

 이문은 돌로 높이 쌓아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2칸 크기로 지은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받침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지봉유설'에 전해진다.

 건축년대를 정확히 알수있는 서울 성곽중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건축물이였으나 2008년 한 이상성격자의  방화로

 전소되었다 참으로 부끄럽고 애석한 일이다.

 

 

 

 

 

  소의문(서소문)이 있던 자리

  서울도성에 있던 4대문과 4소문(나중에 1곳이 만들어져 5소문이었다가 하나가 없어짐)중 서소문이 있던 자리이다.

  소덕문(서소문)은 도성의 서남쪽 숭례문(남대문)과 돈의문(서대문) 중간지점에 있었던 4소문 중의 하나였으며

  태조5년(1396년) 건립되었으며 성종3년(1472년)에 성종이 예종의 비 장순왕후 (章順王后)에게 추존한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는 시호와 같음을 피하기 위해서 소덕문을 소의문(昭義門)이라 개칭하였다.

 

 

 

 

 

 

 

          100여년(105년인가)의 역사를 지닌 정동교회

 

            

 돈의문(서대문)

 돈의문은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서 태조5년(1396년)에 건립되었으나 풍수가 최양선의 주청으로 돈의문을 폐쇄하고

 그 남쪽위치에 새로 문을 내고 서전문(西箭門)이라하였다 그후 세종 4년(1422년)에 다시 좀 더 남쪽위치로

 이전하여 건립하고 본래의 돈의문으로 부르게 하였다.

 이전 이유에 대하여 확실히 알수는 없으나 서전문이 있던 위치가 높고 험하여 통행하기에 불편했을 것으로  보아

 통행의 편의 위함이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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